가수 서수남 씨의 사진과 조영남 씨의 팝아트작품이 소상공인에게 위로와 감사를 전하고 있다.
사진과 팝아트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찬란한 그날까지 조영남 팝아트작품 전’이 중부일보 초청으로 특별 전시되어 시민들을 맞이하고 있다. 2월 6일부터 27일까지의 전시되는 본 행사는 코로나로 힘든 시기를 보낸 소상공인에게 조금이나마 위로를 전하고자 기획된 것으로 알려졌다.
20일 일요일 경기남부뉴스는 전시장을 찾아 오랜만에 여유를 만끽했다. 넓은 홀에는 서수남 씨가 아프리카를 방문해 찍은 아름다운 사진과 화투로 현실을 묘사한 조영남 씨의 팝아트가 걸려있었다. 관람객들은 주로 여성들이 많았고, 마스크를 쓴 채 2~3명씩 천천히 작품을 둘러보고 있었다. 잠시 후 서수남 씨가 붉은 자켓와 청바지를 입고 전시장에 들어왔고, 이내 유쾌한 인사와 함께 사진, 노래, 나눔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검은물소위에 작은 새들이 앉아있고, 몇 마리는 막 날아가려는 순간을 찍은 사진에 대해 “새들이 잘 앉아있어 줬다.”라고 웃는 서수남 씨는 유명한 사진 잡지의 작가들은 몇 달씩 캠프를 치고 넉넉한 지원 속에 장비를 갖추고 촬영하는 것이 조금 부러웠다고도 말한다.
“제가 원래 사진을 좋아했다. 새 사진은 찍기가 쉽지 않지만, 찍다 보면 이렇게 나오는 사진이 있다. 아프리카 봉사를 좀 다녔다. 그곳은 풍경이 너무 좋아서 아무 데나 눌러도 작품이다. 우간다, 에티오피아, 콩고 .. 이 사진은 나일강 상류의 큰 호수에서 찍은 거다.”
서수남 씨와 ‘봉사’라는 단어는 낯설지 않다. 경기도에서 실버, 주부, 소상공인까지 음악으로 찾아가는 그의 행보를 여러 번 접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직접 ‘봉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내 인생이 캄캄한 터널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나는 참 겁 없이 부족함 없이 살아왔다. 하루아침에 굉장한 시련을 당하니까 용기도 잃어버리고 좌절하고 절망 속에 한참을 있었다. 끝이 안 보이던 터널에서 눈을 떠보니 조금 끝이 보였다.”
서수남 씨는 그때를 회고했다. 한 아프리카 봉사단체에서 연락이 왔다. 봉사에 동참하시면 어떻겠냐는 질문에 “내가 구제받게 생겼는데요?”라며, 순수한 봉사를 하고자 아프리카로 날아갔다. 타임머신을 타고 1950년 6.25 한국전쟁 당시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아프리카 도시는 굉장히 발전되어있지만, 시골로 들어갈수록 전기도 물도 공급이 열악한 것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얘들을 도와줄 자격이 없는 줄 알았더니 내가 가진 능력으로만 해도 얘들을 도와주기에 충분하구나”
서수남 씨는 1달러가 3천 실링으로 그곳 노동자의 하루 일당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그곳에서 돈의 가치도 알게 되었고, 7년을 아프리카 봉사에 함께 했다. 아이들이 어떻게 개선되면 좋을까 의논하는 동안 부모를 잃고 단체생활을 하는 아이들의 남루한 옷이 티셔츠로 바뀌고, 그들을 위해 집을 짓고, 허가를 받아 학교를 지었다. 머리만큼 큰 혹을 달고 있는 38세의 한 남성이 한국에 와서 혹 제거술을 받도록 하고, 소아마비에 걸린 아이의 ‘걷는 꿈’을 실현하고자 자전거를 선물했다. ‘그 아이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는지’라며 행복하게 말하는 서수남 씨는 봉사로 생의 전환점을 맞이한 것으로 보였다.
서수남 씨는 최근 ‘울 엄마’라는 신곡을 발표했다. 2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아들을 키워내신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낸 곡으로 깊은 울림이 전해진다. 그에게 조심스레 노래한 곡을 신청했다. “오늘 목 상태 좋다”며 전시회장 무대에 설치된 음향장비에 자신의 기타와 장비들을 연결했다. 전시회장을 찾은 관객들은 거리두기로 앉아, 때아닌 음악회에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기타로 차려진 무대와 그의 사진은 그 어떤 오케스트라보다 진한 감동을 안겨주었으며 소상공인에게 위로를 보내기에 충분했다.
전시회는 27일까지
자가진단키트를 차에 가지고 다니며 방역지침에 적극 동참하는 그는, 이내 유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전시회 작품 판매로 인한 수익금은 모두 앞서 말한 봉사에 쓰일 것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2022년 서수남 씨는 힘찬걸음과 함께 사진, 봉사 그리고 음악으로 시민들과 지속적으로 소통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