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능(陵)위에서 뜨거웠다. 병풍처럼 펼쳐진 소나무 아래에서 융건능의 풍경은 그렇게 눈이 부셨다. 이마를 태우는 햇볕에 땀은 차올랐지만 병풍처럼 능을 둘러싼 소나무와 함께 가을하늘은 닿을 듯 선명했다. 비극을 딛고 일어선 군주 정조, 그는 뒤주 속에 갇혀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을 달래는 화산행차 길에서도 초로의 촌부를 위로했다고 한다.
『정조실록』 1793년(정조 17) 1월 12일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왕이 현륭원을 뵈러 가는 길에 관왕묘(關王廟)에 들렀다. 과천(果川)에서 주정(晝停)하였다. 인덕원(仁德院) 들녘을 지나다 길가의 부로(父老)들을 불러서 위로하며 고통스러운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저녁에는 수원 행궁에 머물렀다」
역사는 이긴 자에게 미래를 주고 패한 자에게 비극을 준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일까? 역사의 비극은 언제나 허공이 아니라 땅위의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다. 대왕 정조 이산(李山), 조선의 마지막 꿈의 군주라 부르고 싶었던 그의 능 앞에서 살아남은 자의 역사는 어떠한가? 삶과 죽음, 절망과 희망의 뒤엉킴속에서 애민을 품고 개혁군주로서 왕도를 실현하려 했던 정조(正祖)는 어떤 나라, 어떤 조선을 꿈꿨을까? 그 미완의 꿈속, 그의 편린을 찾아 나는 가끔 이렇게 건능(健陵)을 찾는다.
요즘 뉴스를 보면 서민들 삶은 하루, 하루가 눈물겨운 다큐인데 정치는 코메디가 되어가고 있다. 위정자는 말에 무게가 실리지 않고 실천이 동반되지 않을 때 말은 그 신뢰를 잃어버린다. 그때, 그때마다 정파 이익만을 앞세우며 국민들 눈가림으로 정당 간판만 바꿔 달며 꼼수에 꼼수로 화답하는 한국 정치가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하며 바닥을 치다 못해 땅속으로 들어갔다. 낡은 답습의 정치는 휘청거리기 마련이고 새로운 정치는 이런 것부터 하지 않는 것이다.
프랑스 정치가 알렉시드 토크빌은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고 했다. 우리는 어떤 정부를 가질 것인가? 역사를 배우지 않으면 인간은 그리고 사회는 진보하지 않는다. 정치의 발전은 국민의 선택에 달려있다. 이 가을 융건능에서 역사를 배우기보다는 역사에서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