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9일 서울 거리 한복판에서 축제를 즐기던 156명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서울 용산구 다목적 실내 체육관 안에는 가방 124개, 옷 258벌, 소지품 156개, 신발 255켤레, 짝 잃은 신발 66개…주인잃은 물건이 가득 놓였다고 한다.
친구들과 나갔다 올게_
집을 나서며 건넨 그 말이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은 몰랐다는 부모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식을 잃은 애비는 하늘을 보며 울었고, 어미는 땅을 치고 가슴을 치며 오열했다.
이태원 상가의 한 주인은 황망한 젊은이들의 죽음 앞에 넋이라도 달래고 밥 한 숟갈 떠먹여 보내야 하지 않겠냐며 생면부지 젊은 넋들을 위한 젯상을 차렸다. 어느 시민은 거리에 누워 뻣뻣하게 굳어가는 모습에 마지막 가는 길 힘들지 않길 바라며 두 손을 가지런히 포개 주었다고 한다. 그저 할로윈 데이라는 거리축제에, 즐거운 하루를 보낼 생각에 친구와 함께 밖을 나섰던 젊은이들은 싸늘한 주검으로 차가운 거리에 누웠다. 친구의 영정사진 앞에 말을 잃은 단짝 친구는 오래도록 빈소를 떠나지 못하고 울었다. 골목길에 흩어진 소지품 그리고 옷가지와 신발들… 채 피워보지도 못한 꽃다운 스무 살 젊은이들은 그렇게 거리에서 허망하게 죽어갔다. 이태원전철역 입구에 놓인 수 많은 꽃들과 포스트잇에 깨알 같은 글씨로 쓰여진 망자들에 대한 슬픈 사연들을 마주한다. 그리고 참담한 심정과 가슴 밑바닥에서 솟구치는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이태원 참사는 우리 사회 안전시스템에 대한 민낯을 그대로 보여줬다. 한국 사회에서는 살아가는 하루, 하루가 투쟁이다. 어린아이와 여성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공동으로 닥친 재난과 죽음 앞에 정치인의 부적절한 언행과 미숙한 소통은 대중의 공분을 자아냈다. 156명의 죽음이 발생한 참사를 논의하는 외신 기자들과 회견하는 무거운 자리에서 가벼운 농담을 던지는 국무총리, ‘참사’와 ‘희생자’라는 표현을 지양하고, ‘사고’와 ‘사망자’를 쓰라며 어떻게든 참사 축소와 책임 면피에 몰두하는 정부, 정제되지 않은 언어로 본인의 정치적 입지만 다지려는 정치꾼들은 분향하는 사진조차도 하나의 홍보수단으로 연출하며 SNS로 퍼나르기 바쁘다. 관료와 정치인들은 국가위기를 관리하고 재난 발생 시 상황을 신속하게 대응하고 수습하라고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들이다. 내 잘못이고, 내 탓으로만 여기는 위정자들은 하나 없고, 이 허망하고 비극적인 죽음을 어쩔거나 발을 구르며 슬퍼하는 것은 오직 자식 잃은 부모의 핏발선 눈과 평범한 일상을 이어 가고픈 착한 백성뿐이었다.
우리 사회는 언제까지 이 같은 참사를 또다시 반복할 것인가!
상식적인 국민은 대단한 것을 바라지 않는다. 국민은 오늘의 이 참담한 희생 앞에 위정자들의 입에서 ‘잘못했습니다.’ 라고 고개를 숙이며, 희생자에 대한, 죽음에 대한, 희생자 가족에 대한 예의를 바란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그저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고 안타까운 죽음 앞에 남겨진 유족을 걱정한다. 세월호의 희생이 떠오르는 이 가슴 먹먹해지는 이태원 골목 거리의 죽음 앞에 우리는 언제까지 이 같은 참사를 또다시 반복할 것인가 묻고 싶다.
우리는, 우리 사회는 오늘의 이 참사의 결과를 마주하며 사회적 성숙의 단초가 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날마다 명복을 비는 사회, 재난이 일상이 되어 버린 듯 8년 전 세월호 참사로 꽃 같은 아이들을 바다에 수장시키고도 똑같은 참사를 되풀이 하는 대한민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