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선교미술관 임선교 관장 “단원과 정석모 화백 등 그림, 청소년에게 긍지와 소망 줄 것”
“정당 국제국의 경험과 노하우, 정책과 법 제정에 헌신하고 싶어”
경기남부뉴스는 7월 6일 인사아트프라자 5층을 찾았다. 오랜만에 들른 인사동은 옛 모습과 새 모습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실타래를 감는 동안 외국 손님에게 재밌는 말을 거는 상인이나 골목 안에 다양한 음식점, 각 갤러리의 개방된 관람 문호는 정겹고 반가웠다. 지하철 4호선 사당에서 1호선 서울역으로 갈아타고 최종 종각역에서 내리면 바로 인사동길이 나온다. 이동이 편리해 남녀노소에게 지금껏 사랑받는 우리나라 명소이며 대한민국의 얼을 드높이는 각종 문물을 지닌 곳이다.
경기남부뉴스는 이날 오후 2시 임선교미술관을 운영하는 임선교 관장을 만나 청소년에 대한 사랑, 문화재 가치와 계승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1995년 용산구청 로비에 큰 창문만 한 그림이 걸려 있었다. 어렸을 때 교과서에서 보던 단원 김홍도의 ’서당‘이었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씨름, 윷놀이, 고기잡이 등 모든 것이 너무 아름다웠다. 그러다 든 생각이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이 왜 화장실 옆에 걸려 있지?’, ‘이 그림을 우리 땅의 청소년이 보고 자라게 하고 싶다’였다. 28년 동안 한 번도 변하지 않았던 이 길은 꽤 다사다난했다. 단원의 풍속화는 임선교 관장의 인생을 바꾸었다.
임선교미술관 임선교 관장은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는 법과 정책 만들겠다”

1955년 충남 당진에서 장군의 후손가에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군수로 임경업 장군의 후손이며 어머니는 강화 권율 장군의 직계손(외할머니)의 딸이었다. 아기 임선교가 태어나고 얼마 안 돼 아버진 기생과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어머니는 핏덩어리 아기와 4남매를 행상으로 키워냈다. 어머니의 고통을 보고자란 아이는 가슴 깊이 ‘인간의 고통은 무엇으로 덜어주나’를 생각했다. 커서는 그것이 법과 정책이라는 것을 알고 국회에 들어가 내 손으로 이루고자 하는 꿈을 평생 갖고 살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자랐다. 76년 중앙대학교 영문과 2학년을 마쳤을 땐 대한항공이 응시기회를 줘서 휴학하고 3년 동안 근무했다. 79년 학교로 복학해 3, 4학년을 마치고 81년 2월 과 수석으로 졸업을 했다. 3월 바로 종로 시사영어학원에 입사해 87년까지 7년간 강사로 활동했다.
9년의 정당 국제국 근무
임선교 관장은 87년이 남다른 해라고 소회했다. 87년 대선을 돕다가 정병국 씨(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와 같이 상도동 비서진에 들어갔고 외신담당 공보비서로 일했다고 말했다. 그러다 90년에 이기택 씨가 꼬마 민주당을 창당하며 임 관장을 불렀고 이후 당은 평민당과 통합되었다. 야당 통합민주당 국제국 부국장으로 정당 일을 사직한 것까지 총 9년(87년~95년)이 흘렀다. 그리고 당시 외교관들과의 교류가 있었다.
‘전국 초중고에 우리 그림 걸어주기’ 꿈을 향한 걸음들
95년 봄이었다, 용산구청 로비에서 단원 풍속화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임선교 관장은 ‘이게 외교관들이 말하던 복제그림’이란 것을 알았다. 당시 필동 한국문화재보호재단(현 한국문화재단, 삼성동 위치)에 그림을 사러 갔다. 그러나 단원 그림의 영인본(影印本: 동의어는 복제, 인쇄, reproduction) 판매권이 특정 단체 독점으로 인해 국민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이일은 국정감사까지 이어졌다. 결과는 여러 사람이 영인본을 사고팔 수 있게 됐다. 임선교 관장은 1995년 10월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의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전통회화 해외보급소 설치‘ 승인을 받았다. 이태원을 시작으로 우리 문화 알림을 시작했다.
95년 가을이었다. 한남동 모 재벌가 바로 앞집에 살던 임 관장은 근처 표구사에 갔다가 정성모 화백의 아름다운 그림을 만나고 연락처를 알게 됐다. 안양에 사는 정 화백과 부인 김 여사는 청소년에 대한 사랑인 ’우리 땅의 청소년이 이 아름다운 그림을 보고 자라게 하고 싶다’는 임 관장의 신념을 아낌없이 응원해주었다. 98년부터 10년간은 플라자 호텔(현, 더 플라자) 지하 넓은 복도에 작품을 전시했다. 미아동 전체, 종로구청까지 임선교 관장은 ‘찾아가는 미술관’을 진행하며 단원풍속화 등과 전통회화 전시를 이어왔다. 99년 4월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필름을 대여받았고 연미술관(대표 전후연)이 3천5백 점의 단원 풍속화를 제작해주었다. 95년부터 2023년 지금까지 모든 비용은 자비로 충당했다.
95년 가을, 임 관장은 봉고 한 대에 그림을 싣고 예술의전당, 서울대병원, 지하철역 안 돌아다닌 데 없이 돌아다녔다. 그러다 99년 가을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다닌다 한들 청소년들이 어떻게 우리 그림을 보고 자라지?’. 그길로 컴퓨터 앞에 앉아 ‘전국 초중고에 우리 그림 걸어주기’ 기획안을 작성했다. 이듬해 2월 서울대박물관 이종상 관장을 만났고 3월 문체부 장관에게 기획안을 제출했다. 그 후로 장관이 바뀔 때마다 ‘전국 초중고에 우리 그림 걸어주기’ 기획안을 23년째 전하고 있다.
내 인생을 바꾼 그림᛫᛫᛫ 단원 김홍도 그리고 정석모 화백
임선교 관장은 말했다. “2~3백년이 지나 퇴색된 동궐도(국보), 서궐도(보물)는 고려대학교 지하 수장고에 있는데, 그림이 정석모 화백의 필력으로 다시 탄생했다. 서궐도는 원래 밑그림만 내려온 것을 화백께서 완성하셨다. 그리고 이 두 점의 그림을 저에게 주셨다.”


정석모 화백(2007년 작고)은 1950년대 삼각지 시절 근대 미술작가들과 같이 미국 초상화를 그렸다고 한다. 당시 미술관을 운영한 모 회장은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는 2~3백 년 된 작품을 그대로 재연할 필력가를 찾았다. 회장의 눈에 띈 정석모 화백은 회장의 요청에 따라 1점 혹 2점으로 작품들을 한정 재연했다. 그의 ’십장생도‘는 재연을 넘어 창작에 속한다고 말한다. 정 화백은 나무색이 빨간 것이 싫어 이때 2점을 나무색으로 그렸다. 그림은 100년 된 비단 위에 그려졌고 그중 1점(작은 사이즈)을 임 관장이 소장하고 있다.
“정석모 화백께서 모그룹 미술관에 수백 년 돼 수명 다한 그림 수십 점을 재현해 또 하나의 원본작품을 남기셨고 임선교미술관에는 대작 7작품과 ’한지 만드는 날‘ 등이 왔다.”
정석모 화백이 남긴 작품은 총 7점이다. 순수창작 3점은 불화, 요지연도, 십장생도이고, 기록화 4점은 동궐도(국보), 서궐도(보물), 능행도, 진찬도이다. 정 화백의 삶 전체는 한 미술관에 수장된 3백 년 가치의 우리나라 문화유산들을 보존하면서도 세상에 내보내는 일이었다. 열면 바스러질지 모를 작품을 그대로 둔 채 한두 점만을 특별하게 재연해냈다. 이름 없는 삶을 살다간 화백과 그 작품을 소중히 간직해온 미술관 관장은 그 가치를 드높였다.
2023년, 이제 남과 북의 청소년에게 ‘이 땅의 아름다운 그림’을…

2020년 8월 국립중앙박물관에 공문을 보냈다. 이듬해 ’전국 초중고에 그림 걸어주기‘ 조건으로 박물관은 수장고 작품 40점 촬영을 허락했다. 연미술관에서 소개받은 포토아트와 2021년 1월 수장고에 들어가 단원 풍속화 등 전통회화 40점을 촬영했다. 유물관리부는 “수장고에 들어간 개인으로는 임선교 관장이 최초”라고 말했다.
임선교 관장은 이제 전국 초중고를 넘어 북한 학교에도 우리 그림 걸어주기를 계획하고 있다. “저의 40점의 전통회화와 박수근 김환기 등 근현대 작가의 작품을 함께 전시하는 것이다. 남과 북의 초중고등학교에 우리 그림이 걸리고 주말에 장소를 개방하면 지역주민들까지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70년간 다른 체제서 살아온 우리 민족이 하나로 어우러지고 언젠가는 통일이라는 반가운 손님이 오시리라는 확신을 한다.”
어렵게 지켜낸 보물 문화재가 그냥 수장고에 잠들어 있기만 하다면 또 얼마나 안타까울까. 그래서 임선교미술관의 임선교 관장은 힘주어 말했다. “어머니의 고통을 보고 자라면서 정책에 대한 관심을 두게 됐다. 그것은 청소년에 대한 사랑이며 ‘우리 그림 걸어주기’라는 방향성으로 일관된 삶을 살게 했다. 정석모 화백 작품뿐만 아니라 단원풍속화 등 전통회화에 담긴 얼이 청소년들에게 긍지와 소망을 줄 것을 확신한다. 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남과 북이 화합하는데 이 그림이 더 큰 역할을 하리라 기대한다.”
또한 임 관장은 “전국 초중고를 넘어 북한 초중고까지 단원풍속화 등 전통회화와 근현대작품(박수근 이중섭 김환기 장욱진님 등의 작품)이 걸려지길 바란다. 70년 남북 간극이 좁혀지도록 윤 대통령께서 이 그림들을(이건희 콜력션을) 재계분들과 들고 북한을 방문해 ‘북한 초중고도 걸어주러 왔노라’ 하시면 얼마나 의미가 깊겠나. 이건희 콜력션이 북한 초중고에도 걸리게 이일을 삼성그룹에 요청하고 대신 삼성그룹이 북한에 의료관광단지를 조성하여 세계 부호환자들 오게 해서 북한이 핵카드를 접게 하는 데까지 대통령이 힘써주십사 하는 게 매일 저의 기도이다”라고 말했다.
임선교미술관 임선교 관장의 28년은 넘어질지언정 포기하지 않았던 뚝심의 삶이었다. 그래서 그 묵묵함이 다음 걸음도 더 단단하고 힘있게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