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개월 전 만 5세 아들과 함께 이수지 작가님의 <파도야 놀자>책을 보았다. 펼쳐보니 글이 없고 그림만 있는 책이었다. 항상 글 있는 책만 읽어주다가 이 책은 어떻게 보여주지 하는 나의 걱정이 무색해지게 우리는 함께 그림을 보며 재미있게 이야기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림 속 아이와 파도가 하나 되는 부분에서 아이는 깔깔깔 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때의 아이와의 소중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던 나에게 현대어린이책미술관에서 안데르센 상을 수상한 이수지 작가의 <춤을 추었어> 신작 전시회 소식은 너무 반가웠다.
11월 26일 나는 프라이빗 도슨트에 초대받아 감사한 마음으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너무나 즐겁고 의미 깊은 작가의 도슨트 시간에 이어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럼 지금부터 이수지 작가의 그림세계를 함께 만나보자
오늘 작가님께 직접 도슨트를 들을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몇 년 사이 아이와 함께 미술 전시회를 가면 20분 정도 밖에 관람을 못하곤 했는데 오늘 작가님의 작품세계에 온전히 들어가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 너무 좋았습니다.
Q. 작가님의 책에는 글이 없는 거로 유명합니다. 있어도 한 줄 정도이지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A. 저는 글이 없어야지만 생기는 이야기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이 있으면 작가의 이야기가 되고 글이 없으면 독자의 이야기가 된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림책의 종류가 많지만 글과 그림이 같이 가는 책도 있고 글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림은 딴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동물원> 같은 경우가 그렇죠. 글에서는 ‘나는 오늘 동물원에 가서 뭐도 보고 뭐도 보고 참 재미있었다’라고 말을 하는데 사실 그림에는 고릴라 우리에 고릴라가 없죠. 그리고 아이는 다른 세계에 가서 상상의 동물들을 만나고 있고 엄마 아빠는 아이를 잃어버려서 패닉 상태가 됩니다. 그림의 세계와 글의 세계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오는 시너지 효과가 있는 책인 거죠.
만약 제가 설명을 글로 쓴다면 독자는 그 글을 읽고 그 글의 기준에서 이야기를 생각할 텐데 글의 기준점이 없으니 그림을 읽게 되는 거죠. 그림의 단서를 더 자세히 보게 되고 정해진 정답이 없으니까 무엇을 이야기해도 되는 셈이죠. 아이들은 자기의 말로 그 여백을 채우는 것인데 저는 그런 방식의 읽기를 너무 좋아합니다.
Q. 이번 신작 <춤을 추었어>도 그런 맥락으로 만드신 건가요?
A. 사실 <춤을 추었어>는 좀 어려울 수 있는 거 같아요. 오늘 제 도슨트처럼 보충되는 이야기를 들어야 이해가 가능한 부분이 있는데 그걸 못 들으면 모호할 수 있는 거죠. 그 모호함을 못 견딜 때 사람들이 외면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그 모호함 자체가 예술의 한 측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모호함이라는 것은 정답이 없다는 것이고 그에 대해 외면하거나 화를 내는 게 아니라 나만의 정답을 만들 수 있는 것이죠. 그림책은 어떻게 보면 가장 어린 나이에 처음 접하는 예술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처음 경험하는 소중한 예술을 위해 그런 가능성의 문이 항상 열려 있는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Q. 작가님의 작품세계에 모티브가 된 작품이 있을까요?
A. 볼레로를 들을 때 떠올랐던 책은 제가 너무 좋아하는 1974년도에 나온 <바람이 불었어> ‘팻 허친스’의 그림책이에요. ‘바람이 불었어’ 이렇게 시작을 하고 화이트 씨의 우산이 바람에 날려 확 뒤집어 버려요. 그 뒤에 풍선을 든 아이가 쫓아가고 있는데 아이가 풍선을 놓치죠. 그래서 화이트 씨의 우산과 함께 꼬마의 풍선이 바람에 실려서 같이 떠올라요. 그 뒤에 결혼하는 신랑의 모자도 바람에 휩쓸려가죠. 계속 등장하는 인물이 들고 있는 물건들이 바람때문에 하늘로 다 날아가는 거예요. 점진적으로 하나씩 하나씩 날아가는 게 더해지면서 예상이 되면서도 아이들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너무 재미있고 신나는 거죠. 많은 물건들이 펄럭펄럭 날아올랐는데 갑자기 바람은 마치 실증이라도 난 듯 가지고 놀던 그 모든 걸 섞더니 아래로 내동댕이 쳐요. 그러고는 마지막에 바다로 불어가 버려요. 이렇게 예상 가능하지만 마지막에 약간의 트위스트가 있는 부분이 너무 멋진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제가 너무 좋아하는 책이고 저를 그림책의 세계로 들어오게 했던 책 중에 하나는 <시소>라는 글 없는 책이고 1961년 엔조마이라는 디자이너가 만든 거에요. 시소위에 동물이 한 마리 떨어지고 균형을 맞추면서 다른 쪽 동물이 떨어집니다. 이쪽으로 기울었다가 저쪽으로 기울었다가 하며 긴장감을 주면서 양쪽에 동물들이 계속 쌓여요. 마지막에 올라온 동물들로 인해 균형이 무너지게 됩니다. 시소 아래로 우르르 떨어질 줄 알았던 동물들이 시소위에서 한 덩어리를 이루어 시소가 기울지 않는 균형이 맞추어진 상태가 되죠. 원래 다 붙어있는 애들인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제가 이 책을 볼로냐에서 처음 보고서 잠시 그 자리에서 숨을 멈추면서 아무 말도 못 했어요. 이렇게 작은 종이 안에 이런 내용이 다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 저를 완전히 매료 시켰어요. 글이 없기 때문에 내가 그림을 계속 이해하면서 제 마음에 단서가 계속 쌓여가는 거죠. 이런 그림책이라면 나도 너무 만들어보고 싶다고 생각을 했어요.
Q <춤을 추었어>가 볼레로 음악을 바탕으로 만드셨어요. 루시드폴의 음악으로 <물이 되는 꿈>, <여름이 온다>도 사계를 들으며 표현하셨는데 그림책을 음악과 연관을 지으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A 저는 음악을 좋아하고 많이 듣는 사람입니다. 음악도 사실은 말이 없고 모호한 예술이잖아요. 어떤 음악은 드라마가 있기도 하고 서사가 있으니까 정확한 이야기가 없어도 마음속에서 무언가 느끼게 하죠. 막연하게 음악이 그림책이 된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가 우연한 기회에 루시드폴 책<물이 되는 꿈>을 작업하면서 그때 음악과 그림책이 연결되는 작업에 큰 매력을 느꼈죠. 가사가 있지만 여전히 음악이라는 게 매개체가 되고 그 음악으로 완성되는 책을 만들고 나니까 이제 그 다음에는 가사가 없는 책으로 해보고 싶고 그 다음에는 음악의 구조를 빌려와서 해보고 싶었어요.
<여름이 온다>를 사계와 접목해서 작업 했을 때 사실 이 책이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걱정이 많이 되었어요.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그걸 가지고 창의적으로 수업을 하시더라고요. 어떤 선생님들은 제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수업을 하시는데 이를테면 여름이 온다 QR을 켜서 음악을 틀어 놓고 1악장 2악장 3악장이 있는데 그 음악에 맞춰서 책장을 넘기는 거예요. 아이들이 끝날 때 맞춰서 같이 끝날 수 있도록 해보는 것도 하시던데 너무 재미있겠더라고요. 그 중 어떤 아이들은 늘 음악을 들으면서 자라는 아이들도 있겠지만 어떤 아이들은 음악을 접하기 어려운 친구들도 있을 텐데 저는 많은 아이들이 그림책도 음악도 많이 접하면 좋겠습니다. 볼레로 같은 경우도 마지막에 클라이맥스가 있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며 일정한 흐름과 서사가 있어서 그림책하고 닮은 장르라는 생각이 들어서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Q. 볼레로를 처음 들었을 때 스페인 춤곡이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저는 행진곡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어떻게 볼레로를 들으시면서 <춤을 추었어> 작품이 나온 건지 궁금합니다.
A. 볼레로를 들어보면 처음에 작은 스네어드럼으로 시작해서 목관악기 현악기 등이 추가되면서 점진적으로 커집니다. 그걸 들으면서 그림의 크기라든지 색깔이 하나씩 추가되는 방식으로 해보면 어떨까 생각을 해서 무작정 그렸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제목이 과거형인데 아까 언급한 <바람이 불었어> 책이 저에게 많은 영감을 준 책이어서 그 말의 느낌을 살리고 싶었어요. 현재 진행형보다 이미 있었던 일을 암시한 것 같은 말투가 아련하면서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또한 여기서의 춤은 자연과 평화 속에서 아름다운 춤이기도 하고 동시에 행진곡풍으로 어떤 흐름에서 계속 앞으로만 가야 하는 춤이기도 하죠. 역사가 계속 반복되는 것에서 오는 아이러니도 있고 섬뜩해지기도 하지만 불꽃놀이로 죽음의 춤을, 인간의 운명을, 삶의 덧없음을 나타내기도 하죠. 물론 아이들에게는 이 내용이 큰 의미가 될 수 없지만 이 그림책은 독자가 굉장히 다양하기 때문에 각자의 삶에서 해당된 사람들이 각자의 코드로 읽어내는 게 그림책이죠.
Q. 마지막에 불꽃놀이가 나옵니다. 불꽃놀이를 표현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A. 볼레로를 들을 때마다 엉뚱하다는 느낌과 불안하다는 느낌이 동시에 들었어요. 스페인 왈츠곡이라 춤을 출 수 있지만 마음속에 약간의 긴장감이 항상 존재했고 마지막 부분에 가서 모든 악기들이 한 점을 향해 달려가다가 쾅 하고 터지는 그런 카타르시즘을 매번 느꼈습니다. 그것을 시각적으로 표현을 하고 싶었을 때 항상 불꽃놀이가 떠올랐어요. 그리고 불꽃놀이를 크게 그리고 싶어서 종이도 한 줄로 이어지는 그림이었다가 옆으로 펼쳐지다가 불꽃놀이가 나오는 페이지는 아래에서 위로 확장된 형태로 표현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불꽃놀이의 계기가 된 건 작년 2023년 10월 7일에 포털사이트에 들어갔는데 위 사진에는 여의도의 화려한 불꽃놀이 사진인데 아래 캡션은 하마스 이스라엘 전쟁 상황이라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뭔가 오류가 있었겠죠. 그날 우리나라에서는 여의도 불꽃놀이가 있었고 동시간에 하마스와 이스라엘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죠. 하마스에서 로켓포를 쏘면 이스라엘에서 이 로켓포를 격추시키기 위한 로켓포를 또 쏴요. 그 두 개의 로켓포가 궤적을 그리면서 가거든요. 밤에는 그 궤적이 선을 그리는데 사진으로 보면 너무 아름다워요. 이토록 아름답게 보이는 불꽃놀이의 이면은 하늘 아래 불타는 도시로 참 처절했어요. 너무나 아이러니하다고 생각이 되었고 그 안을 들여다볼수록 너무 끔찍하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전쟁 상황으로 걸어 들어가는 어떤 아이의 여정이 제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Q. NFT로도 책이 판매되고 있습니다. 굉장히 새로운 시도를 하셨는데 어떻게 진행하게 되었나요?
A. 종종 그런 생각을 했어요. 디지털로 갔을 때 책은 어떤 느낌일까? 물론 요즘에 전자책도많이 보지만 전자책은 기본적인 개념이고 거기에서 더욱 어떻게 발전되어 나아갈까? 우리가 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 기준이 뭘까? 궁금증을 가지며 디지털 작업의 기회가 온다면 도전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여름이 온다> 책을 작업할 때 음악에 관한 책인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결국 QR 코드를 인쇄하는 거 밖에 안 되나? 거기서 더 나아갈 수 없을까? 하는 갈증을 느꼈어요. 그러던 중 마침 어떤 회사에서 NFT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NFT 출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메일이 온 거예요. 당시 저는 NFT가 뭔지 잘 몰랐어요. 그래서 고견을 들려주시면 같이 이야기해보고 싶다고 답장을 보낸 걸 시작으로 지금은 이렇게 판매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NFT는 대체 불가능한 토큰인 거잖아요. 디지털 파일을 판매하지만 이것이 그냥 복사-붙여넣기를 하면 똑같이 보일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증해 주는 거죠. 여러분이 구입하신 NFT는 일련번호가 있고 진품임을 인정하고 여러분의 어떤 정보가 같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여러분 것이다 하고 도장을 찍어주는 거죠. 처음에 그림책의 한 장면을 NFT화 해서 판매를 해보자 했는데 저는 새로운 걸 해보고 싶어서 NFT로 책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했어요. 책은 페이지가 많기 때문에 아직 NFT출판이 적극적으로 검토된 건 거의 없었어요. 페이지를 분절하는 방식으로 생각을 해보자는 의견이 나왔고 볼레로음악이 정말 구체적으로 저에게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NFT화 작업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Q. 개인적으로 더 많은 독자들이 작가님의 도슨트를 들었으면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래도 전시 관람객분들과 책 독자분들에게 어떻게 감상하면 좋을지 팁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A. 저는 그림책은 있는 그대로 봐도 좋고 내용을 알고 봐도 좋은 거 같아요. 그래서 제가 오늘 말씀드린 사전 지식이 있으면 더 즐거워지는 부분도 있지만 동시에 너무 많은 정보와 이렇게 작가의 의도가 너무 강하게 들어가면 그만큼 또 자기 안에서의 이야기는 줄어드는 셈이죠. 모르는 상태로 책을 보시거나 전시를 보는 것도 좋다고 봅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재미있는 일을 하는 것뿐이거든요. ‘내가 재밌으니까 너도 재밌지 않니’라고 애들한테 물어보는 것뿐이죠.
저는 그게 너무 재밌는 것 같아요. 이렇게 좋아하는 것들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재밌어하고 헤어졌다가 또 뭔가 계기가 있으면 또 만나고, 그런 과정인 것 같아요. 그런 독자들과 계속 같이 가고 싶죠. 그거는 독자의 취향이자 선택이니까 어떻게 할 수 없지만 그냥 그렇게 같이 존재했으면 좋겠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