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이후 일제는 강제 동원령을 내려 일본인과 조선인을 가리지 않고 많은 젊은이를 징집했다. 일본은 대략 6만 명의 조선인을 사할린으로 보내 탄광촌과 벌목장에서 강제노역을 시켰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항복했고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들은 이번엔 러시아의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사할린에 사는 이들은 일제 당시 강제징용된 자신들을 한인이라 지칭한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이들과 그 자손을 사할린동포로 부른다. 2020년 대한민국 정부는 사할린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여 이들이 국내로 돌아와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을 시작했다.
2023년 1월 25일 사할린이산가족협의회와 외교부 등에 따르면 우리 정부가 작년 9월 영주귀국 및 정착지원 사업 대상자로 선정한 사할린동포 1세와 동반가족은 모두 350명이다. 이 가운데 80대 고령인 동포 1세는 13명이다. 동반 가족들은 195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에 출생한 이들로 알려졌다.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 장기화로 러시아와 한국을 잇는 하늘길이 막혀 우리 정부가 영주 귀국 지원 대상자로 선정한 사할린동포 절반 이상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사할린동포의 사연을 많은 국민들에게 알리고자 5월 12일 경기남부뉴스는 인천 사할린경로당 문정현 회장을 만났다. 역사를 알고 후대에 전하기 원하는 기자들을 문 회장은 반갑게 맞이했다.
태어나보니 사할린 섬이었다
올해로 정전 70년을 맞이했다. 국민들에게 사할린동포 영주귀국자에 대해 알려달라는 기자단의 질문에 문정현 회장은 1938년생인 자신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부모님은 사할린에 계셨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느덧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그분들을 대신해 자신과 같은 1세대들이 한국에 들어왔다.

문 회장의 부모님은 1938년 강제징용에 동원되어 사할린으로 끌려와 석탄을 캐고 도로를 건설하는 일에 배치되었다. 부모님은 생각했다. ‘반년 아니 일년이면 고향땅에 돌아갈줄 알았는데…” 45년 전쟁이 종식된 후에도 돌아올 수 없었다. 정전 후 일본은 사할린으로 배를 보내 자국민만 일본으로 데려갔고 우리네 부모님들은 사할린에 남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힘든 노역을 버텨온 한인들은 마지막 배가 떠난 후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했다. 그들에겐 희망이 없었다. 이후 사할린 섬에 러시아군이 들어왔다. 주권을 러시아가 갖게 됐고 고국에 돌아갈 희망이 없는 한인들은 결국 그 곳에 정착하게 됐다.
강제징용됐던 우리 국민은 일본인, 러시아인, 한인, 무국적자로 살았다.
1. 참을수가 없도록 이가슴이 아파도
여자이기 때문에 말한마디 못하고
헤아릴수 없는설움 혼자 지닌채
고달픈 인생길을 허덕이면서 아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일생
2.견딜수가 없도록 외로워도 슬퍼도
여자이기 때문에 참아야만 한다고
내스스로 내마음을 달래어 가면서
비탈진 인생길을 허덕이면서 아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
– 이미자의 노래 ‘여자의 일생’
그 당시에 문정현 회장의 부모를 비롯한 한인은 러시아말도 몰랐고 일을 해야 했기에 학교를 다닐 수도 없었다. 사회주의가 뭔지 공산주의가 뭔지도 몰랐다. 그냥 명령에 복종하면서 살았다. 어느 날 문 회장은 한국에 와서 가수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을 듣는데, 그것이 우리 사할린동포의 삶과 똑같았다. 사할린의 한인은 일본이 지배할 때는 일본인이 아니기 때문에 말 못하고 참아야 했고, 러시아가 지배할 때는 러시아인이 아니기 때문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무국적자는 권한이 없었다. 민족차별과 고문을 당하며 자유 없이 살아왔다.
전쟁이 끝난 후 아버지는 다시 징용을 당해 일본으로 끌려갔다. 이중징용이었다. 기가 막힌 현실에 문 회장이나 당시 한인들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를 다시 만나기까지 15년이 걸렸다.

6세에 사할린 일본 학교에 입학했고 종전 후 조선학교에서 공부를 이어갔다. 16세에 일을 해서 돈을 벌려고 했으나 “아버지를 찾으라, 그러기 위해선 공부를 하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마음에 담았다. 이후 사범대학, 기술대학까지 졸업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급여와 학업 등 여러면에서 러시아는 노골적인 차별을 강행했다. 어머니는 밤이면 몰래 이불속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아들 문정현에게 한국을 이야기해줬다.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기약이 없었기에 한인의 95%는 북한 국적을 취득했다. 문 회장은 아버지와 만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다. 이로인해 아버지를 찾아도 부모 자식을 증명하는데 강산이 한번 변하는 등 15년 만에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짧은 2년을 아들과 함께 보내고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사할린에서 돌아가셨다. 문정현 회장은 부모님으로 인해 ’무조건 우리 부모님의 고향인 울산, 한국에 와야된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에 들어와 보니 사할린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행복이 있었다. 국적을 취득하고 내 조국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한국에 온지 15년…대접이 감사하다
한국에 온 지 벌써 15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러시아 말로 먼저 생각하고 한국어는 두 번째 생각난다. 지금까지 인천에서 살고 있는데, 러시아에서 받지 못한 대접을 한국에 와서 받고 있다. 여기 한국 사람은 우리를 “러시아인”이라고 부르는데 그 말이 섭섭하지 않고 오히려 이 소리가 반갑게 느껴진다.
사할린경로당은 복지관
사할린경로당은 LH아파트 인근에 있다. 이 아파트에는 약 350명의 영주귀국자들이 거주하고 있다. 러시아에 가족 일부를 두고 온 또 다른 이산가족이다. 구성원 3분의 2 정도가 80세에서 100세의 고령이고, 3분의 1 정도는 79세에서 55세의 젊은이다. 보통 1년에 10여 명이 사망하며 사할린경로당이 상주가 되어 이들을 돌아보고 있다. 홀로 사는 영주귀국자들의 역방문을 진행하고, 아직 남은 영주귀국자 서류 작성, 생존서류를 러시아로 보내는 일, 병원방문 등의 일을 도맡고 있다.
경기남부뉴스 기자단은 사할린경로당 문정현 회장을 통해 나라잃은 국민의 아픔을 아련히 느낄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도 대한민국 국민이 먼 타국에서 잊혀진 채 살아왔다. 외교적 역량이 부족해 그들을 데려올 수 없었던 시절을 간과해선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