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깨우는 첫 꽃에 환호하는 이유는 작고여린 강인함으로 혹독한 겨울과 싸워서 이겨냈기 때문이다. 욕구를 자극하는 신나고 강열한 유혹에 노출 된 우리 아이들을 지키려면 적절한 기술로 아름다운 싸움을 걸어야한다. 우리의 아이들이 세상을 바르게 바라보고 자신의 욕구를 스스로 조절할 수 있을 때까지 마음의 싸움터에서 그 싸움을 시작해야한다.
4월 중순을 넘어서니 봄기운이 완연하다. 길가에 쏟아지는 벚꽃잎과 담장에 늘어진 노란 개나리. 이맘때쯤이면 누구나 아름다운 꽃구경을 위한 스케쥴 하나는 꼭 챙길 것이다. 필자가 사는 이곳 원주도 주말마다 꽃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사실 화려하고 향기로운 꽃들은 계절의 여왕인 5월에 더 많이 핀다. 그런데도 우리가 소박한 첫 봄꽃에 환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혹독한 겨울과 싸워서 이겨낸 작고 여린 강인함 때문일 것이다.
‘작고 여린 강인함!!’ 따지고 보면, 이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작고 여린데 어떻게 강인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표현을 우리는 흔히 ‘역설적 표현’이라고 한다. 서로 모순되는 말을 같이 한꺼번에 함으로써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더 크게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유치환 님의 <깃발>이라는 시에서 사용되었던 ‘소리 없는 아우성’, 김소월 님의 <진달래꽃>에 나왔던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등이 대표적인 역설적 표현이다.
오늘의 주제인 ‘아름다운 싸움’도 역설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싸움은 아름다울 수가 없다. 고성과 함성이 오가고, 어느 한 편에는 반드시 패배와 좌절이 오며, 추한 모습으로 끝날 확률이 크기 때문에,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것이 싸움이다. 하지만 싸워서 지켜내야 할 대상이 소중한 생명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싸움은 충분히 아름다울 뿐 아니라, 반드시 끝까지 싸워서 이겨야 한다. 서두에 언급되었던 봄꽃의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추운 겨울로부터 생명을 지켜내기 위해 꽃눈을 만들어 치열하게 싸운 결과, 그렇게 고결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냈으니까 말이다.
이 시대에 아이를 키우는 부모님들이라면 봄꽃의 싸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즘 우리 아이들은 수없이 많은 해로운 유혹들과 함께 살아간다. 대부분 2차적인 사고력보다는 1차적인 욕구를 자극하는 강렬하고 신나는 것이다. 어떤 것은 어른들조차도 해로움을 자각하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흡수해 버린다. 사람의 몸에는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이 흐르고 있어서, 1차적 욕구가 충족되면 다음번에는 조금 발전된 2차적인 욕구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더 강력한 1차적 욕구가 생긴다. 그래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중독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 거대한 내면의 욕구와 주변의 유혹에서 우리 아이들을 지켜내기 위해 부모님들이 아이들과 아름다운 마음의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아무 탈 없이 건강하고 거기에 공부까지 잘하면, 그 수준에서 만족하고 아이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하지만 정말 지혜로운 부모라면, 아이들의 마음이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를 민감하게 살펴야 한다. 은연중에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판단하고, 자기의 욕구를 채우는 데에만 빠르며, 공의와 규칙을 어기는 것을 가볍게 여기지는 않는지, IT기계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끌려다니는 노예가 되지는 않았는지…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알 수 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날 때, 그냥 넘기지 말고 반드시 적절한 기술로 아름다운 싸움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부모라는 권위로 아이들을 누르고, 억압하라는 뜻이 아니다. 누르고 억압하는 것은 싸움의 기술이다. 기술이 잘못된 것일 뿐, 싸움 자체는 꼭 필요한 것이다. 상황에 따라 싸움의 기술을 대화로, 때로는 편지글로, 때로는 훈육으로, 때로는 기도로까지 바꾸면서 부모들의 아름다운 싸움은 계속되어야 한다. 아이들이 세상을 바르게 바라보고 자신의 욕구를 스스로 조절할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지난 칼럼의 마지막에 언급했던 데드라인(dead line)의 절박함, 그 마음으로 아이들과 마음의 싸움을 해야 한다.
필자에게는 자폐성 발달장애를 갖고 태어난 아들이 있다. 이 아이에게 의사는 초등학교 4학년 이상의 공부를 할 수 없다며 불치병을 진단했고, 존경하는 스승님은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정상이라는 판정을 내렸다. 필자는 의사가 아닌 스승의 말을 받아들였다. 살길은 그 길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아이의 행동이 이상해 보이는 내 눈과 싸웠고, 실제로 아들과도 싸웠다. “너는 정상이야. 그러니까 오늘부터 정상인 네 누나와 모든 것을 똑같이 해야 해.” 매사에 끝까지 기다리고 싸웠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아들은 정상 아이들과 똑같이 일반대학에 가서 영어학을 전공하고 있다.
필자의 개인적인 사례뿐만 아니라, 수많은 변화의 이야기들이 우리 주변에 분명히 있다. 도와주고 지지해 줄 동료를 만들고 함께 싸워 나간다면, 분명히 우리가 원하는 목표점에 다다를 수 있다. 늦기 전에 아름다운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싸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