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건일의 걷다보니 81회] 눈보라 속에서 만난, 말로 다 할 수 없는 지리산 중백종주

  • 등록 2026.01.26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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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남부뉴스 김정옥 기자] 새벽 네 시. 바람은 얼굴의 살을 스치며 옷깃 사이로 파고들고, 몸은 본능처럼 움츠러든다. 지리산국립공원 중산리탐방지원센터. 아직 어둠이 산을 완전히 움켜쥔 시간, 천왕봉을 향한 발걸음이 조용히 시작된다. 헤드랜턴 불빛만이 길을 비추고, 숨소리와 발걸음 소리만이 산과 대화를 나눈다. 칼바위 구간까지는 놀라울 정도로 평온했다.

눈도 없고, 바람도 없다. 봄이 온 줄 착각할 만큼 부드러운 공기 속에서 ‘오늘은 축복 같은 산행이겠구나’ 하는 기대가 스며든다. 하지만 산은 언제나 그렇듯, 쉽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일출 전에 정상에 도착해야 한다는 조급함과 ‘과연 제시간에 닿을 수 있을까’ 하는 부담을 안고 칼바위분기점을 지나 급경사에 들어서자, 하늘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고도를 올릴수록 눈이 흩날리고, 로타리대피소 부근에서는 마침내 세상이 하얗게 뒤덮인다.아이젠을 단단히 조이고, 방한에 다시 신경 쓴 뒤, 침묵한 채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이어간다.

 

 

바람은 점점 거칠어진다.몸이 휘청거릴 만큼 매서운 돌풍이 온몸을 흔들고, 산은 더 이상 ‘오르는 대상’이 아니라 ‘견뎌야 할 존재’가 된다. 그리고 오전 7시 15분. 마침내 지리산 천왕봉, 해발 1915미터. 정상석에 새겨진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한국인의 기상 이곳에서 발원하다.” 그러나 기대했던 일출은 없었다.

 

기상청 예보와 달리 사방은 구름과 눈보라뿐.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진 공간에서, 그저 눈을 맞으며 인증사진을 남긴다. 아쉬움보다도, 이곳에 서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눈보라를 뚫고 장터목대피소 방향으로 조심스레 하산한다.제석봉을 지나 장터목대피소에 도착해 잠시 숨을 고르고, 젖은 몸과 마음을 정비하며 아침을 먹는다.그리고 다시 길 위로 나선다. 연하봉과 화장봉 사이, 지리산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연하평전. 봄과 여름이면 야생화로 가득한 그 넓은 평야가, 오늘은 눈으로 덮인 또 다른 세계가 되어 있다. 흰 여백 위에 바람이 그림을 그리고, 고요 속에서 산은 말없이 웅장하다.

 

 

오랜만에 보는 눈 덮인 연하평전의 풍경은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웠다. 화장봉에서 연하봉을 바라보는 순간,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연의 위엄이 가슴을 꽉 채운다. 그 장엄함 앞에서, 나는 그저 작은 존재였다.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린다. 그리고 그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걷다 보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아까 그 장면이 다시 떠오르는 순간, 눈물은 멈출 줄을 모른다. 자연 앞에서 감동으로 이렇게 울어본 것이 이번이 두 번째다. 얼마나 울었는지, 흘러내린 눈물이 얼굴 위에서 얼어붙는다. 그래도 이상하게, 고통보다 감사가 컸다. 이 장면을, 이 감정을, 이 산행을 허락받았다는 사실이. 삼신봉을 지나 촛대봉에 오르자 시야가 탁 트인다. 세석평전이 한눈에 들어오고, 마음에도 여유가 스며든다.

 

뒤돌아보면 지나온 길이 장엄하게 펼쳐지고, 앞에서는 여전히 강풍이 불어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고개를 숙인 채 바라보는 풍경마저도, 지리산은 아름답다. 세석대피소에 도착해 잠시 쉼을 가진 뒤, 백무동탐방지원센터를 향해 본격적인 하산을 시작한다.

빙판 구간을 피해 조심스럽게, 눈길에 넘어지지 않도록 한 발 한 발 안전을 선택한다. 긴 하산 끝에 도착한 백무동. 총 거리 19.6km, 소요 시간 8시간 57분. 이 산행은 기록으로 남기기엔 부족하다.

 

눈보라 속에서 만난 지리산은, 사진으로도 말로도 담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저 온몸으로 맞닥뜨리고, 마음으로 울고, 감사로 내려온 하루. 지리산은 오늘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앞에서 조금 더 겸손해져서 내려왔다.

 

 

김정옥 기자 kgnamb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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